유럽 축구리그 중에서도 독일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과 인기를 자랑한다. 특히 최근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 핫스퍼 FC에서 활약하며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해졌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팀들을 중심으로 분데스리가 각 구단별 특징 및 역사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분데스리가(Bundesliga)란?
분데스리가는 독일어로 ‘독일 국가대표팀’이라는 뜻이다. 1904년 처음 출범했으며, 현재 1부 18개팀 2부 16개팀 총 32개팀이 소속되어 있다. 참고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는 세리에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EPL, 프랑스 리그앙은 리그앙이라 부른다.
분데스리가 대표 클럽은?
분데스리가 우승 횟수로는 바이에른 뮌헨이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레버쿠젠/샬케 04/볼프스부르크/호펜하임 순으로 5회씩 우승했다. 이외에도 도르트문트 4회, 함부르크 SV 3회, 마인츠 05 2회, 묀헨글라드바흐·슈투트가르트·프라이부르크·헤르타 BSC 베를린 각각 1회씩 우승했다.
분데스리가 역대 한국선수는?
분데스리가 최초의 한국인 선수는 차범근 감독이다. *--****시즌 레버쿠젠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이자 첫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이후 *--****시즌까지 두 시즌간 맹활약하며 UEFA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31경기 출장 14골을 기록했는데, 당시 유럽 무대에서 뛰던 아시아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득점이었다. 하지만 부상 여파로 *-**-****시즌 도중 방출됐고, 이후 은퇴하기까지 10년간 주로 하부리그에서만 활동했다.
이후 1994년 6월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 입단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유럽 진출 행보를 보였다. 1997년 8월엔 스코틀랜드 셀틱FC로 이적했지만 적응에 실패하면서 이듬해 다시 친정팀 복귀 후 199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차범근 감독 다음으로는 안정환 선수가 2001년 7월 부산 아이콘스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며 K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곧바로 일본 J리그 시미즈 S펄스에 입단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덕분에 주가가 치솟았고, 같은 해 여름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 자격으로 중국 슈퍼리그 다롄 스더에 입단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2003년 초 미국 LA 갤럭시로 이적했다. 2005년 12월 페루자와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2006년 독일월드컵 출전을 위해 귀국했으나, 대회 직전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했다. 2007년 경남 FC로 돌아와 2008년 말까지 뛰었다.
다음으로는 설기현 선수가 2000년 벨기에 안더레흐트에서 레딩 FC로 이적하며 영국 무대에 진출했다. 2004년 풀럼 FC로 이적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SC로 임대되기도 했다. 2009년 11월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이적하였고, 2010년 9월 QPR로 이적하였다. 2011년 챔피언십(2부리그) 돈캐스터 로버스 FC로 이적하였으나, 2012년 중반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재이적 하였다. 2013년 겨울 FA 신분으로 자유계약신분이 되어 원소속팀이던 울산 현대 호랑이로 복귀하였다. 2014년 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였으며, 2015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였다. 2016년 사우디 아라비아 알 힐랄 SC로 이적하였다가 2017년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예선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화제가 되었다.
박지성 선수는 교토 퍼플상가 시절이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 때 발탁돼 본선 엔트리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비록 본선에선 뛰지 못했지만 21세 이하 청소년대표로도 뽑혀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 부임 직후인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거스 히딩크 감독 체제 하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가 에인트호번 유소년팀에서 성장하던 박지성은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지성의 포지션은 윙어였다. 물론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자리였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나 중앙 미드필더로서의 재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다만 이영표라는 경쟁자가 있었기에 주전 자리는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 투입되며 드디어 선발 기회를 잡게 되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고, 어느덧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리고 이어진 터키와의 3~4위전에서 후반 36분 쐐기골을 터뜨리며 승리를 견인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월드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활약 덕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의 이적 역시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맨유 입성 초기에는 라이언 긱스에게 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곧 특유의 성실함과 헌신적인 플레이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전반 45분 만에 퇴장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치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신임을 얻었고, 급기야 첼시 FC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선제골을 넣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쳐보였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박지성은 퀸스 파크 레인저스 FC와의 정규리그 경기에서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오랜 시간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공백기간을 가져야 했고, 이로 인해 기량 저하 우려마저 제기됐다. 게다가 동료였던 파트리스 에브라와도 불화설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다시금 정상급 플레이어로 거듭난 박지성은 지난 시즌 종료 후 열린 재계약 협상에서 무려 주급 40만 파운드(한화 약 6억원)짜리 초대형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